1.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석권
서울 올림픽 이후에도 한국 탁구는 국제 무대에서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굳건히 했습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강희찬, 김택수, 문규민, 박지현, 유남규 선수가 남자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현정화, 홍차옥 복식조가 여자복식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금메달 외에도 여자단체전, 혼합복식에서 은메달을, 남자단식과 남자복식에서는 동메달도 획득합니다. 또한 같은 해에 있었던 제1회 세계복식컵 탁구대회에서는 김택수, 유남규 선수의 남자복식과 현정화, 홍차옥 선수의 여자복식이 모두 금메달을 차지합니다.
2. 한국 최초의 남북 단일팀 출전과 우승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스포츠 종목 중 최초로 남북 단일팀이 출전해 여자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했고, 김택수 선수는 21세의 나이에 한국 남자 탁구 최초로 세계선수권 단식 동메달을 획득합니다. 김택수 선수는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탁구 월드컵에서도 각각 동메달과 은메달을 획득하며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1993년에는 현정화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단식에서 우승하며 한국 탁구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세계선수권 단식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현정화 선수가 은퇴한 1994년 이후에도 한국 탁구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남자복식 금메달, 1995년 탁구 월드컵 남자단체전 금메달 등 꾸준히 좋은 성적을 일궈냈습니다.
3. 김택수 선수의 선전
그중에서도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남자단식 결승은 대중들에게 특히 기억에 남는 경기입니다. 경기 중 나온 김택수 선수와 류궈량 선수 간의 '전설의 32구 랠리'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38mm의 작은 셀룰로이드 공을 사용했고, 스피드 글루도 사용했기 때문에 수세에 몰리면 반격하기 어려웠습니다. 32구의 긴 랠리 동안 로브 하는 수세의 상황에서도 마지막 반격 기회를 찾아 득점하는 모습은 김택수 선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습니다. 김택수 선수는 32구 랠리 이후 기세를 몰아 역전하고, 3게임까지 승리하여 3대0으로 류궈량에게 승리를 거머쥡니다. 김택수 선수의 금메달은 1986년 유남규 선수 이후 12년 만의 아시안게임 남자단식 금메달이었습니다.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김택수 선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1995년 김택수 선수는 톈진 세계선수권대회 남자단식 8강에서 중국의 왕타오를 꺾고 4강에 안착합니다. 하지만 다음날 국제탁구연맹은 김택수 선수가 사용한 스피드 글루가 규정치의 6배가 넘는 유해성을 가졌다고 판단합니다. 김택수 선수는 공인된 독일제, 일본제 스피드 글루를 사용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주최국인 중국이 견제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실격패한 김택수 선수를 사람들은 '무관의 제왕'이라 불렀으며,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미심쩍은 실격패에 대한 울분을 해소할 수 있는 값진 승리였습니다. 김택수 선수는 최고 세계 랭킹 3위, 10년 이상 10위권을 유지하며 '아시아의 호랑이'라는 칭호를 얻음과 동시에 지금까지도 일본식 펜홀드 그립 전형의 교과서라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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